Jinheungwangneung │ Royal Tomb of King Jinheung

4/5 기반으로 8 리뷰

Contact Jinheungwangneung │ Royal Tomb of King Jinheung

주소 :

Seoak-dong, Gyeongju-si, Gyeongsangbuk-do, South Korea

카테고리 :
도시 : do

Seoak-dong, Gyeongju-si, Gyeongsangbuk-do, South Korea
전용진 on Google

주차공간이 아주좋아요
The parking space is great
S
Sunjae Hyun on Google

10월 진흥왕릉 주변 국화꽃이 예뻤습니다..^^ 주상절리는 덤으로 다녀왔습니다..
In October, the surrounding chrysanthemums were beautiful. ^^ I have to go to my house.
김도윤 on Google

응~나는 진흥왕 후손이야^^
Yes~ I am descended from King Jinheung ^^
J
J-W Lee on Google

소박한 곳이었네요, 신라발전의 큰 역할을 했었는데 무덤은 소소했음...
It was a simple place, it played a great role in the development of Silla, but the tomb was small ...
고용배 on Google

주 메뉴 열기 편집주시하기다른 언어로 읽기진흥왕 신라 진흥왕 新羅 眞興王신라의 제24대 국왕김삼맥종(金三麥宗), 김심맥부(金深麥夫)540년~576년불교526년신라 금성576년 (향년 51세 또는 43세)신라 금성사도왕후입종 갈문왕지소태후법흥왕진지왕건원(建元), 개국(開國), 대창 진흥왕(眞興王, 526년~576년, 재위: 540년~576년)은 신라의 제24대 임금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다.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법운(法雲)이다. 법흥왕의 동생이며 지증왕의 아들인 입종 갈문왕(立宗 葛文王)구진(仇珍)과 법흥왕의 딸 식도부인(息道夫人, 지소태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큰아버지이자 외조부가 된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1]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흥왕 때는 신라의 전성기였으며, 정복 군주로 불렸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원산만까지 진출한 흔적은 마운령비에서 알 수 있다. 540년 7월부터 576년 8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540년 7월부터 이듬해 541년 3월까지 법흥왕의 왕후인보도태후가 섭정(수렴청정)하였고 541년 3월부터551년 3월까지 어머니 지소태후가 섭정(수렴청정)하였으며 551년 3월부터 559년 3월까지 친정하였고 559년 3월부터 이듬해 563년 3월까지 상대등 구해공이 대리청정하였으며 563년 3월부터 575년12월까지 다시 친정하였고 575년 12월부터 이듬해576년 3월까지 왕후인 사도왕후 박씨가 대리청정(수렴청정)하였으며 576년 3월부터 같은 해 576년4월까지 미실궁주가 잠시 1개월간 대리청정, 이후576년 4월부터 576년 8월 붕어할 때까지 둘째아들김사륜(훗날 진지왕)이 태자 신분으로 대리청정하였다. 생애편집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삼국사기에는 534년생 반면에 삼국유사에는 526년생으로 나와있다. 여러가지 역사적 기록을 대립해서 살펴볼때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로 여겨진다. 15세 때였던 540년 신라 법흥왕의 붕어로 왕이 되었는데, 540년부터 이듬해 541년까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가 섭정을 하였고 541년부터 551년까지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였으며 그 후551년부터 친정하였다. 544년, 흥륜사를 창건하였다. 이듬해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고[2] 팔관회를 두었다. 가야 사람인우륵으로 하여금 신라에 악을 보급하게 하였다.[3]553년, 황룡사를 창건했다.[4] 568년에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으며[5], 572년에 다시 홍제(鴻濟)로 바꾸었다.[6]576년, 원화(源花) 제도를 만들어남모와 준정의 두 여인으로 하여금 300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으나, 곧 두 여인이 서로 시기하다 남모가 죽는 일이 발생하자 원화를 폐하고 화랑(花郞)을 제창하여 고구려, 백제 정벌의 원동력을 이루게 하였다. 말년에는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되었다고 하며, 왕비인 사도왕후 또한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576년(진흥왕 37년), 5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그가 죽자 신라의 왕위는 태자 동륜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사륜(진지왕)이 승계하였다. 영토 확장편집 진흥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548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백제의 한강 북쪽(한북, 漢北)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은 백제의 성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7]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 [8]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는 함경남도, 함경 북도에 진출하여 순수비을 세웠는데,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연합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등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것을 제의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을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의을 받아들였다. 신라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로 영토을 확장하고 백제로 진군하였으나, 백제가 화해를 시도하여 진군을 멈추었다. 553년 7월, 진흥왕은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9][10] 이로써 신라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1] 같은해, 음력 10월에 백제의 왕녀가 진흥왕에게 시집 왔다.[11] 한편, 이듬해 백제 성왕은 한강을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겨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이를 크게 격파하였고, 백제 성왕은 신라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554년).[12] 백제는 남하하여 충청남도 부여로 후퇴하였다. 562년,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같은 해,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복속하였고 군대를 강화하였다.[13]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가 전해진다. [14] // 외교편집 564년,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15]565년,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16] 566년, 567년, 568년, 570년, 571년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17][18][19][20][21] 572년,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22] 가계편집 아버지 : 입종 갈문왕어머니 : 지소태후(只召太后): 법흥왕과 보도부인왕비 : 사도왕후 박씨장남 : 동륜태자차남 : 신라 제25대 왕 진지왕삼남 : 김구륜장녀 : 태양공주차녀 : 아양공주삼녀 : 은륜공주사녀 : 월륜공주후궁 : 숙명궁주 태종 이사부사남 : 정숙태자후궁 : 보명궁주 구진과 지소태후후궁 : 미실궁주: 미진부와 묘도부인오남 : 수종전군오녀 : 반야공주육녀 : 난야공주후궁 : 소비 부여씨 성왕후궁 : 월화궁주 가야국의
Open main menu Read more in other languages Silla promotion king King's 24th king Kim Sammacjong and Kim Shim's Bukkake 540-576 Buddhism 526 years Silla Geumseong 576 years (51 or 43 years old) King's Advent Kalmun Wangji Empress Law Heungwangjinji Wanggunwon, Jingguk, Xinchangchang King Jinheung (眞 興 王, 526-576, reign: 540-576) is the 24th king of Silla. The surname is Kim (金) and the name is 맥 Sammacjong (三 麥 宗) or heart veins (深 麥夫). Beopmyeong as a Buddhist monk is beopun (法 雲). He was born as a son of King Gumjong, the late King Muncheong, the son of King Jeung Heung, and the wife of the wife of Edo Edo (道 夫人). Beopheung of Silla is the keunahbeoji and broodmare to Jinhung. In order to cultivate talents for the development of the country, King Jinheung reorganized the Hwarangdo Island into a national organization and organized the Buddhist denomination to promote ideological integration. Based on this, Silla took the Han River basin under the rule of Goguryeo and advanced to Hamgyeong-do, and conquered Daegaya in 562 and seized the west of the Nakdong River. This expansion of Silla has two production capacities in the Nakdong and Han river basins, which not only suppressed Baekje and prevented the forces of Goguryeo's invasion, but also went directly to Su-Dang in Incheon Bay. is entered into between the Union saw the establishment of the Three Kingdoms. [1] This was a chance that after the Silla Dynasty seized the initiative in the competition. Jinhung When was the golden age of Silla, was called as a conquering monarch. The trail to Wonsan Bay, which was the territory of Goguryeo, can be seen in Maunyeongbi. During the reign from July to 576 in August, 540, July, 540, and the following year, 541: March, the Queen's Empress, the Queen's Emperor, was entrusted (converged). He was regent (converging and cleansing), and he was friendly from March 551 to March 559 to March, and from January 559 to March 563, March. From 575 December to the next year, 576, March, Queen Wang, the Queen's deputy, was the deputy chief. (Cleaning convergence) March, 576, April 576. The second son, Kim Sa-Ryun (later King Jin-ji), acted as a "priest" until the year of August 576, during the big fish. Life editing Changnyeong Shilla Jinheung King Chuckkyung Samguksagi has Yusa born, while 534 are found in a 526 - year - old. In contrast to various historical records, the Three Kingdoms-like history is considered to be true. At the age of 15, he became king with a crucian of King Shilla Jeungheung, from 540 to the following year, from 540 to the following year. From the friendly In 544, he founded Heungryunsa. The following year, according to the recommendation of the director, the council made a compilation of "national history." In 551, Yeon-ho was changed to a nation [2] and a Pyong-phall-gwan was established. [4] In 553, he founded the Yellow Dragon Temple. [4] In 568, Yeonho was changed to Taechang [5], and in 572, it was changed back to Hongje. [6] In 576, two women, Nam-Nam and Jun-Jung Jung He had a group of 300 people, but soon two women were jealous of each other, and the death of the mother and mother occurred. In later years, he was said to have been under the legal name of law, and the queen, Queen Apostle, was also a nun and stayed in Yeongheungsa. 576 years (Jinhung 37 years), and seungha at the age of 51 years. When he died, the throne of Silla was succeeded by the second son, Sa-yun (King Jinji), because he died in 592. Territory expansionedit King Jinheung began to lead the conflict between the three nations with his active conquests. In January of 548, King Yang-gu of Goguryeo simulated with Ye and attacked Doksanseong, the northern part of the Han River in Baekje. The King of Baekje, who had made a Naze alliance with Silla, sent a reaper to Silla for salvation. King Silla ordered General Zhu Jin to leave with 3,000 armored soldiers. Joojin walked day and night and reached the bottom of Doksanseong to fight against Goguryeo soldiers and defeat them. [7] Goguryeo's internal affairs broke out and Silla and Baekje attacked and occupied the upper reaches of the Han River in Goguryeo (551). [8] Silla gained 10 group brighteners is to give the 6 groups. Shilla made inroads into South Hamgyong Province and North Hamgyong Province, and settled pure costs. Goguryeo could not cope with Silla's territorial expansion due to the war against earthquakes. At this time, Baekje proposed to unite Silla to attack Goguryeo Pyongyang. Goguryeo suggested not to march into Pyongyang, the capital of Goguryeo instead of allowing the newly developed lands of Jinheung, such as Gyeonggi-do, Hwanghae, and the northwest of the Korean peninsula, to be shilla. Jinhung accepted rejected jeuieul of Baekje and Goguryeo jeuieul. Silla extended its territory to Gyeonggi-do, Hwanghae-do, and the northwest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and marched to Baekje, but Paekje stopped trying to reconcile. In July 553, King Jinheung invaded the banks of the Han River in Baekje, removed several castles, established a new province, and made a strong armed force. [9] [10] Shilla seized the area downstream of the Han River occupied by Baekje and surrounded it. This expansion of Silla has two production capacities in the Nakdong and Han river basins, which not only suppressed Baekje and prevented the forces of Goguryeo's invasion, but also went directly to Su-Dang in Incheon Bay. is entered into between the Union saw the establishment of the Three Kingdoms. [1] In the same year, the prince of Baekje was married to Jinheung in October in the lunar calendar. [11] On the other hand, the following year, King Baekje invaded Silla, resentful of the robbery of the Han River, but Silla was greatly defeated, and King Baekje was killed by a soldier at Silla (554). Brighteners by southward was retracted to Chungcheongnam given. In 562, in the fall of July, Baekje invaded the people of the border, and the king shut up his army and killed or captured over 1,000 people. In the same year he subjugated Daegaya and strengthened his army with the work of Saddam. In addition, pure water rain was built on newly pioneered land. To date, four pure rains (Changnyeong, Bukhansan, Hwangcho-ryeong, Maun-ryeong) are transmitted. [14] // Diplomatic editing In 564, he sent a reaper to the North Korean Emperor. [15] In 565, the Emperor Moocheng of the North Korean Emperor wrote down the letter and sent the King Jinheung to the Dongyi Bridge. He was made the king of Shilla King of the Nakrang Army. The Qin dynasty and the monks who lived in the Qin dynasty were sent to prevent and sent 1,700 books of Buddhist discourse. [16] In 566, 567, 568, 570, and 571, Silla sent a god of death to the Qin Dynasty. [17] [18] [19] [20] [21] 572 years, the tribute was sent an envoy to the Northern Qi (北齊). [22] Edit Household Father: Galmun KingMother: Ji Sotaehu (只 召 太后): Lee Heung Wang and Madam Queen: The Queen of Sado's Queen Park Nam-nam: Dong-wheel Prince Tea Boy: Sillara the 25th king JinjiwangSam-Nam: Kim Gu-Ryun: : Wol-wheel Princess Consort: Sook Myung Palace Taejong Directors: Jung Sook Palace Confucius: Bo Myung-ju Palace Gujinjin and Jiji Empresses: Beauty Palace: Mijinbu and Mr. Consulate: Wolhwa Hwajuju
이교일 on Google

구절초 꽃향으로 가득한 서악동 고분군~
Seoak-dong burial mound full of Gujeolcho flower scent~
J
Jong Yeol - 정종열 Jeong on Google

무열왕릉 보시고 옆길로 차로 쭉올라가면 나옵니다. 무료구요. 무열왕릉보다 산책등 하기가 더 좋은곳이던데 왜 사진이나 리뷰가 없는지 모르겠더군요.. 국사배울땐 무열왕보다 진흥왕이 더 대단했던거 같던데ㅎㅎ
After seeing the Royal Tombs of Muyeol, go straight up the side road by car. It's free. It was a better place to go for a walk than the tomb of King Muyeol, but I don't know why there are no photos or reviews.. King Jinheung seemed to be more amazing than King Muyeol when learning Korean history.
G
GT Cha on Google

신라 진흥왕묘를 비롯하여 몇기의 왕릉이 있는 곳이지만, 무열왕릉의 관심에 묻혀 소박하기 그지없다. 방문객이 많지 않아 차라리 조용하게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 무열왕릉을 굽어 보면서 남산을바라 볼 수 있다는 점 또한 좋다.
There are several royal tombs, including the tomb of King Jinheung of Silla, but it is unpretentious because of the interest in the tomb of King Muyeol. There aren't many visitors, so it's nice to be able to spend some quiet time on my own. It is also good that you can see Namsan while looking down on the tomb of King Muyeol.

Write some of your reviews for the company Jinheungwangneung │ Royal Tomb of King Jinheung

귀하의 리뷰는 다른 고객이 정보를 찾고 평가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평가 *
당신의 검토 *

(Minimum 30 characters)

당신의 이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