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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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Yongcheon-ri, Okcheon-myeon, Yangpyeong-gun, Gyeonggi-do,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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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Yongcheon-ri, Okcheon-myeon, Yangpyeong-gun, Gyeonggi-do,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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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jong Ham on Google

함씨시조 함씨대왕을 모셔 놓은 함씨각이 있는 신라시대 용문사보다 큰 사찰이었는데, 수차례 전란으로 사라진 사찰을 상당한 기간을 거쳐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과 함께 함씨각, 삼성각, 조사전, 종각 등이 잘 정리되어 있는 아름다운 사찰.
It was a temple that was bigger than the temple of Yongmun in the Shilla Dynasty, where the Ham-ke Si-ham-sa-ga-ga was buried. The temple was destroyed several times and after a long period of time, Beautiful temple with well-laid out lines.
김명희 on Google

용문산 밑에 계곡을 따라 올라 기다보면 한적하고 조용한 절이 있습니다 신기 하게 둘레가 돌담으로 쌓여 있네요
If you wait along the valley below Mt. Yongmun, there is a quiet and quiet temple.
심한섭 on Google

양평군옥천면소재지에있는 사나사절 조용하고 깨끗하고 개곡또한 1급수 계곡물 4계절 흐른다 절 입구쪽에는 황토펜션있고 각종 식당상주하고있다
Sanaa Temple in Okcheon-myeon, Yangpyeong-gun, is quiet and clean, and the valley water flows in four seasons.
P
Pluet bsoli on Google

사나사舍那寺 거꾸로 읽어도 사나사 읽다보면 가본듯 한 사나사 절의 유래 This temple was built by Yonggyeong, a disciple by the great monk of the Goryeo Dynasty in Yongmunsan Mountain, Okcheon-myeon, Yangpyeong-gun, Gyeonggi-do. 양평에서 37번 국도를 따라 가평으로 가다 신애리에서 오른편으로 꺾어들면 양평군 중앙 북쪽에 용문산(해발 1,175m)의 주봉 백운봉이 힘차게 솟아 있다. 용문산은 고려시대까지 미지산(彌智山)이라 불리다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기품이 빼어난 이 명산을 알아보았던지 용이 드나드는 산 용문산(龍門山)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미지는 미리의 완성형이며, 미리는 용의 새끼를 일컫는다고 한다. 따라서 미지산이나 용문산이나 그 뜻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셈이다. 용문산에 윤필암·죽장암·상원사·보리사 등의 명찰들이 있었던 것도 빼어난 산세와 무관치 않았겠으나, 지금은 죽장암·보리사가 자취 없이 사라졌다. 신애리에서 시야 가득 펼쳐지는 풍광을 감상하며 용문산으로 가다보면 함왕혈(咸王穴)이 나오고, 사나사(舍那寺) 위쪽으로 함왕산성이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호족세력인 함규 장군이 태어난 구멍으로 함왕성을 쌓을 때 밖에 두고 쌓아 고려에 복속되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호족세력인 함규(咸規) 장군은 사나사 남쪽 맞은편 함왕성의 성주였다. 당시 그는 양평지역에서 이름을 떨치던 호족세력 견훤과 궁예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경계지역 성주였는데, 실리와 때를 기다려 왕건에게 귀의한다. 바로 이들 함씨 세력이 웅거하던 곳이 함공성(咸公城), 또는 함씨대왕성(咸氏大王城)이다. 함공성은 당시 2만 9,058척이었으나, 지금은 정문과 그 좌우로 이어지는 석축만 남아 있다. 용문산에서 흘러내리는 용천은 옥같이 맑고 투명하며, 용천은 곧 미르내라 불렀으니 절골이라는 뜻이다. 그 용문산 자락에 안긴 사나사는 비로자나 법신부처님이 상주해 있다. 신애2리 마을 초입에서 사나사까지는 약 3.5㎞. 지금의 사나사는 작은 절에 불과하지만, 옥천1구 옥정(玉井)마을과 옥천2구에 있는 삼층석탑·석조좌불상·당간지주 등이 옛 사나사의 석물들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예전 사나사는 가늠하기 쉽지 않은 대찰이었을 것이고, 마을에 전해오는 얘기로는 사나사 이전에 대월사(大月寺)가 있었다고도 한다. 신애리에서 용천2리를 지나 산길로 오를수록 계곡물소리가 청량하다. 계곡물소리는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스하게 들리니 그 또한 예사로운 조화가 아니다. 그렇게 자연을 벗삼아 오르다보면 예전 승가고시가 치러지던 서울 봉은사의 일주문을 근년에 이곳으로 옮겨온, 키가 훤칠하게 커서 맞배지붕이 더욱 견고해뵈는 일주문이 찾는 이를 맞는다. 일주문을 넘어서면 훤하게 드러나는 분지가 있는데, 이런 산중에도 이렇게 평평하고 넓은 분지가 마련돼 있다는 자연의 조화가 새삼 감동스럽기도 하다. 절은 아담하고 조촐한데다 한적해서 더욱 좋다. 마당 건너 정면에 대적광전이 있고, 그 뒤로 가파르게 치솟은 용문산봉이 마치 부처의 광배를 이루듯 장엄하게 서 있다. 대적광전 앞 오른쪽으로 절 규모에 어울리는 예쁘장한 삼층석탑과 원증국사 석종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가 있으며, 양 옆에 산신각과 함씨각이 있다. 절 아래편에 함왕혈이 있고, 이 절에 함씨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나사는 아마도 함규 장군의 원찰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함규 장군이 고려의 개국공신이었고, 사나사가 개국 초기인 923년(태조 6)에 창건됐으니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신라 경명왕 7년(923) 대경 여엄대사가 제자 융천스님과 함께 창건한 사나사는 공민왕 때 태고 보우스님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으나 이후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하여 지금은 아담하고 한적한 절이 되었다. 사나사는 태조의 국정자문위원 격이었던 대경국사 여엄(大鏡國師 麗嚴, 862~930)이 제자 융천과 함께 창건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대경대사에게 나라일을 의논하던 태조는 어느 날 사나사 동편 보리사에 주석케 했음을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문』(菩提寺大鏡大師玄機塔碑文)에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대경대사가 사나사 이전에 있던 대월사를 창건에 가까운 규모로 중창했을지도 모른다. 보리사터에 있던 대경대사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1367년(공민왕 16) 태고 보우대사가 140여 칸 규모로 중창했으나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고, 1698년(숙종 24) 소규모의 법당을 재건했으나, 1907년 의병과 관군의 충돌로 또다시 흔적 없이 소실되고 만다. 1909년과 1937년에 중건했으며, 현재 정면 4칸 측면 3칸의 대적광전은 1993년에 새로 지었으니 탑도 절도 본래 모습이 아니다. 대적광전은 시원스런 팔작지붕집이고,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보궁형 닫집이 있다. 『봉은본말사지』에는 창건 당시 오층석탑을 세웠다고 기록돼 있는데 지금 사나사엔 오층석탑은 간 곳 없고, 역시 창건 때 세웠다는 안내판과 함께 삼층석탑 1기가 서 있다. 2.8m의 아담한 삼층석탑은 상륜부가 없어졌으나 기단부와 탑신부는 온전하다. 기단부와 탑신부는 온전하나 상륜부가 없어진, 높이 2.8m의 아담한 삼층석탑으로 사나사 창건 당시에 함께 세웠다는 말처럼 신라 말 고려 초의 석탑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곳 양근군 대원리서 태어나 왕사와 국사를 지낸 원증국사 태고 보우(1301~1382)의 석종부도는 기단부가 완전히 푸른 돌이끼로 덮여있어 신비감마저 준다. 석재가 화강암인 부도인데, 표면엔 아무 조각도 없이 평이하고 부도 정상에만 화염문을 조각한 낮은 보주가 얹혀 있다. 전체 높이는 2.75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이다. 비는 비좌 위에 평이한 돌로 양쪽 받침대를 세우고 비신을 얹은 다음 지붕돌을 놓았다. 비문은 뒷날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를 사뭇 비판했던 중현대부 성균제(中顯大夫 成均祭) 정도전이 글을 짓고 의문(誼聞)이 글씨를 써 1386년(우왕 12)에 세웠다. 비신 앞뒷면에 빼곡이 담겨 있는 글씨는 비교적 선명해 꼼꼼히 짚어보면 판독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고려국사 이웅존자(利雄尊者)가 소설산에서 입적하였다. 문인들이 화장한 곳에서 사리를 얻으니······강후(姜侯) 만령(萬)이 돌을 깎아 종을 만들어 사리······를 간직해 사나사에 안치하였다······”고 적고 있다. 얇디얇은 비몸돌이 마치 창호지문 뚫리듯이 숭숭 뚫려 있을 정도로 훼손이 심하다. 한국전쟁 때 총에 맞아 심하게 상처를 입은 탓이다. 공민왕 때 사나사를 크게 중창한 원증국사 태고 보우스님의 석종부도로 아무런 장식이 없이 소박하다. 정도전이 글을 짓고 의문이 글씨를 써서 우왕 12년에 세운 원증국사 태고 보우스님의 부도비인데 한국전쟁 때 총을 맞아 심하게 상처를 입었다. 태고 보우대사는 13세에 양주 회암사 광지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삼각산(북한산) 중흥사 동쪽에 태고사를 짓고 수도하였으며, 충목왕 2년(1346) 원나라에 들어가 청공(淸珙)의 법을 받고 임제종의 제19대 법손이 되었다. 2년 뒤 귀국하여 용문산 북쪽 기슭 소설암에 머물면서 국사·왕사가 됐고, 1382년 여기서 입적하였다. 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이다. 절마당 탑 옆에 조선냄새가 물씬 나는 소나무, 요사 앞에 미끈하게 잘생긴 향나무 등 절을 가꾼 솜씨가 따뜻하게 느껴지고, 깊은 계곡을 끼고 풍광 좋은 곳에 들어앉은 소박한 절인데다 워낙 한갓지게 들어앉아 찾는 이가 적어 더욱 좋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사나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9 - 경기북부와 북한강, 초판 1997., 13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김희균, 김성철, 유홍준, 문현숙, 정용기)
Sanasa Temple I read it backwards The origin of the Sanasa Temple, which seems to have been read. This temple was built by Yonggyeong, a disciple by the great monk of the Goryeo Dynasty in Yongmunsan Mountain, Okcheon-myeon, Yangpyeong-gun, Gyeonggi-do. From Yangpyeong, follow National Highway 37 to Gapyeong, and turn right at Sinaeri. The main peak of Yongmunsan Mountain (1,175m above sea level) in the center of Yangpyeong-gun rises vigorously. It was said that Yongmunsan was called Mijisan until the Goryeo Dynasty, and when King Seongjo of the Joseon Dynasty climbed to the throne, he recognized this famous mountain that was deprived of elegance. It is said that Miji is a complete form of Miri, and Miri refers to a dragon cub. Therefore, there is no difference in the meaning of Mt. The nameplates of Yun Pil-am, Jukjang-am, Sangwon-sa, and Bora-sa in Yongmun-san may not have been related to the outstanding mountain landscape, but now Jukjang-am and Bora-sa disappeared without a trace. When you go to Yongmun Mountain while watching the scenery that spreads out from Sinaeri, you will see Hamwang-hyeol, and there is Hamwang-sanseong Fortress above Sanasa. It is said that Goryeo, the nation's national communist and patriarchal general, Hamgyu, was born, and when he built the city of Hamwang, it was built outside and subjected to Goryeo. General Goryeo Hamgyu, the country's national communist and patriarchal, was the lord of Hamwangseong across the southern part of Sanasa. At that time, he was the lord of the border area, where the ancestral forces of the Yangpyeong region and the royal family were in sharp opposition, waiting for the time with Sily and returning to Wang Geon. This is where Ham Ham's forces lived in Hamgongseong (함 公 城) or Hamsi's Great Castle (咸 氏 大王 城). Hamgongseong was 29,058 ships at the time, but now only the main gate and the stone pillars leading to the left and right remain. Yongcheon flowing from Yongmunsan is clear and transparent like jade, and Yongcheon is called Mirnae. The Sanasa, held at the foot of Yongmunsan Mountain, is home to Viroza and the Buddha of the Ministry of Justice. About 3.5km from the entrance of Sinae 2-ri village to Sanasa. It is said that the current Sanaa temple is only a small temple, but the three-storied stone pagoda, the stone statue of Buddha, and the Tanganji Temple in Okcheon 1-gu Okjeong Village and Okcheon 2-gu were said to have been the remains of the old Sanaa Temple. If so, the old Sanaa Temple would have been difficult to measure, and it is said that there was Daewolsa Temple before Sanasa. From Sinaeri to Yongcheon 2-ri, as you go up the mountain path, the sound of the valley water is cooler. The sound of the valley sounds cool in the summer and warm in the winter, so it's not an unusual harmony either. If you go up to the nature like this, you will find the one who ordered the Bongeunsa Temple in Seoul, which was formerly known as Sangha, and moved to this place in recent years. There is a basin that is clearly revealed beyond the one-day order, and the harmony of nature that this flat and wide basin is provided among these mountains is also impressive. The temple is small and quiet, and it is better to be quiet. There is a great adversary at the front across the yard, and the steeply rising Yongmunsanbong stands magnificently like a Buddha's Gwangbae. To the right in front of the Daejeokwangjeon, there is a pretty three-story stone pagoda that fits the size of the temple, and Seokjongbudo of Wonjeokguksa (Gyeonggi-do Tangible Cultural Properties No. 72). Considering that there is Hamwang-hyeol at the bottom of the temple and Ham Si-gak at the temple, Sanasa was probably the patrol of General Hamgyu. Moreover, General Hamgyu was Goryeo's national public official, and Sanasa was founded in 923 (Taejo 6), the beginning of the country, so I guess what it might have to do with it. The 7th year of King Gyeongmyeong's reign in Silla (923), the founder of Daegu Yeoum along with his disciple, Jungcheon, was greatly revered by King Taego Bous during King Gongmin, but has since become a small and secluded temple due to several wars. Sanasa was founded by Taekyung's national advisory council member, Daekyung Guksa Yeoum (大 鏡 國 師 8, 862 ~ 930), along with his disciple Yongcheon. Taejo, who was discussing national affairs with Ambassador Daegyeong from China, says in one article, ‘Boridaedaedaedaedaegidaepabimun’ (菩提 寺 大 鏡 大師 玄機 塔 碑文 文). In that case, the Great Ambassador may have cultivated Daewolsa Temple, which was before Sanaa, on a scale close to the founding. The Daegyeong Daesabi, located in the Bodhisattva site, is currently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In 1367 (King Gongmin 16), the archaeological prosecutor of the ancient archaeology of 140 squares was burned, but all were burned during the reign of Jeong Yu-jae, and a small court was rebuilt in 1698 (Sukjong 24). . It was rebuilt in 1909 and 1937, and now the Great Optoelectronics with 4 squares on the front and 3 squares on the side was newly built in 1993, so the tower and the temple are not original. The Daejeokjeon Hall is a cool palgakjip roof, and there is a Virozana Samzon Buddha enshrined in the court hall and a bow-shaped canopy. In Bongeun Bonmalsaji, it was recorded that the five-storied stone pagoda was erected at the time of its foundation, but now there is no five-storied pagoda in Sanasa. The small three-story pagoda of 2.8m has no top wheel, but the base and top are intact. The proximal and pagoda priests are intact, but with a small three-story pagoda with a height of 2.8m, the top wheels are missing, showing the style of a stone pagoda of Goryeo Cho, the word Silla, as it was built at the time of the founding of Sanasa. Seokjongbudo of Taego Bow (1301 ~ 1382), Wonjeokguksa Temple, which was born in Daewon-ri, Yanggeun-gun, and was a king and a king, gives the mysterious feeling even with the base of the stone covered with moss. Budo, which is made of granite, is plain with no fragments on it, and a low orb is carved with flame doors only on the top of the budo. The total height is 2.75m, and tangible cultural property No. 72 of Gyeonggi-do. The rain was placed on both sides of a pedestal with plain stones, and the pedestal was placed, and then a roof stone was placed. The inscription was written in the late 1386 (Woowang 12), written by Jeong Do-jeon, a middle-aged and modern-day Seonggyun-je, who wrote criticisms of Buddhism by writing "Fire Jobs" later. The text with the subtracted music on the front and back sides of the novel is relatively clear, so reading it is not difficult. “Korea's history, Lee Woong-ja (利 雄 尊者), was enrolled in the novel. The literary men obtained saree at the cremation site, and afterwards, Gangnyeong Manyeong cut the stone and made a bell to keep the saari ... ·· ” The damage is so severe that the thin and thin non-body stones are pierced like a window-print. It was because he was shot and severely wounded during the Korean War. It is unpretentious without any decoration as the stone bell of Bogo, who was the native priest of Wonjeok, who greatly emphasized Sanasa during King Gongmin. Jeong Do-jeon wrote a letter and questioned it, and he was a booby of Taego Bous, a native of Wonjeok, built in the 12th year of the Uwang era. He was shot and hurt badly during the Korean War. At the age of 13, Taewoo Bower released Gwangjiseon, Hoeamsa Temple in Yangju, as a silver temple. In the east of Jungheungsa, Samgaksan (North Hansan), Taegosa was built and capitalized.In the 2nd year of King Chungmok (1346), he entered the Yuan Dynasty and received the law of Qinggong. After returning to Korea two years later, he stayed in the novel at the foot of Yongmun Mountain, and became a national and royal priestess. Rain is tangible cultural property No. 73 of Gyeonggi-do. It is a simple temple that has a warm feel of the temple, such as pine trees with a Joseon scent next to the temple courtyard, and a slippery handsome juniper tree in front of Yosa. It is a simple temple that sits in a good view through a deep valley. . Source: [Naver Knowledge Encyclopedia] Sanasa (Guide to Exploration 9-Northern Gyeonggi and Bukhangang, First Edition 1997., 13th Printing 2012., Korean Cultural Heritage Society, Kim Hyo-hyung, Kim Hee-gyun, Kim Seong-cheol, Hong Joon, Moon Hyun-suk, Jeong Yong-gi)
정현호 on Google

용문산 사나사는 큰절은 아니지만 절 옆의 계곡 소리를 귀로 듣고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Yongmunsan Sanaa is not a big temple It is a place where you can hear and feel the sound of the valley next to the temple.?
김기원 on Google

산속 고즈넉하고 평온하며 공기도 좋아 둘러보기 좋았습니다
It was nice to look around because it was quiet and peaceful in the mountains and the air was good.
권순용 on Google

고려말 원증국사 태고 보우 스님께서 주석하셨던 곳이라 합니다. 태고 보우스님의 부도가 북한산 태고사와 가평 설악면 소설암지 그리고 사나사에 있습니다. 양평을 지나는 길에 사나사에 잠시 들렸었는데 다음 번에 찬찬히 둘러보겠습니다.
It is said to be the place where the ancient monk Bou of Wonjeungguksa in the late Goryeo period commented. The father-in-law's father-in-law is located at Taegosa Temple in Bukhansan Mountain, Soseolamji Temple in Seorak-myeon, Gapyeong, and Sanasa Temple. On the way through Yangpyeong, I stopped by Sanasa for a while. Next time, I will look around carefully.
K
Kaitie Travels on Google

Freaking gorge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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