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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마운틴 저널
“우리는 믿는다. 까마득한 고도에서의 든든한 재밍과 믿음직한 너트, 떠오르던 초승달과 자일파트너의 한숨, 아무렇게나 닦아낸 프라이팬과 함께한 길고 길었던 벽 위에서의 여행들, 그리고 가뿐 숨소리의 기억들. 우리는 여명이 시작되기 전 줄을 묶었고, 사막 같은 설원에서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셨다. 터덜거리며 설벽을 내려와 몸을 뉘일 때 산정의 렌즈운은 떠올랐고…. 풀려간 로프의 끝에 머무르던 시선과 차가운 맥주 한잔으로 마무리되던 나날들, 그 모든 것에 관한 믿음 말이다.”
2002년 <알피니스트> 창간호에 실린, 당시 발행인이었던 크리스찬 벡위드가 편집자 노트에 쓴 이 글은 지금까지도 알피니스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볼트와 페이스가 아닌) 너트와 크랙, 눈으로 닦아낸 지저분한 코펠들, 기분좋은 선등, 가뿐 호흡과 서서히 물들어오는 알펜글로우, 허벅지가 터질 듯한 플런지 스텝, 만년설 위의 렌즈구름이 몰고 올 폭풍과 시원한 맥주 한 잔…. 알파인등반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이 문장에 담긴 철학은 단순히 산과 산을 오르는 사람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거기에 담긴 독특한 의미를 자아낸다.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의 알피니스트 편집자들도 이렇게 말한다.
“알피니스트 0호의 편집자 노트에 이러한 말들이 등장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와 표현의 형태를 계속 추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글에 담긴 전통을 고수하려 한다. 알피니스트는 항상 독립적인 미디어, 진실한 저널리즘, 예술적혁신의 가치를 믿어왔으며, 여전히 독자들의 지지에 의존하고 있다.”
<아메리칸 알파인 저널> 편집자이던 크리스찬 벡위드는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이자 IT기업 사업가인 마크 유잉에게 진짜 알피니스트를 위한, 알피니스트에 의한, 알피니스트의 목소리가 실린 산악전문지를 만들어보자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뒤 의기투합한 이들은 지하의 작은사무실에서 <알피니스트> 창간준비호인 0호를 내놓았고, 세상의 산에 오르던 사람들은 채 90페이지가되지 않은 이 얇은 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나는 <알피니스트>를 창간호부터 구독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산악인으로서 한국 산악계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매체의 역할에 대해 늘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당시만 해도 이른바 ‘선진’을 표방하는 서구산악계의 정보와 그들의 시각에 대해 늘 궁금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알피니스트>는 언제나 기다림의 대가를 충분히 채워줬다. 계간으로 발간되는 만큼 책에 실린 글들은 호흡이 길었고, 또그만큼 깊었다.
월간 <마운틴>에 합류하고 기자생활을 시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적어도 <알피니스트>와 같은 매거진을 한국에서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다. 처음 이마운틴으로 시작한 월간 마운틴은 한 페이지도 그냥 넘기지 않는 책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남선우 발행인과 몇몇 젊은 산악인이자 출판편집자들이 뜻을 모아 만든 잡지였다. 나 역시 그 속에서 일하며 한국 잡지사에 획을 그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깊이와 담론을 담아내고 <알피니스트>와 같은 편견 없는 정보와 예술적 가치를 한국의 산악계에서 실현해보고자 20~30대의 젊은 시간을 전부 쏟았다.
<알피니스트>는 2008년까지 창간발행인이 운영해왔다. 언어의 확장성이 한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어 시장이지만, 처음부터 독립미디어를 지향한 이 책 역시 최소한의 광고와 독자들의 구독료로만 운영하는 데에는 무수한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들리는 말로는 그래서 이들의 뜻을 함께하는 후원자가 매번 책 발간을 도왔으며,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미국 경제가 휘청대다 후원이 끊어지자 파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의 월간 <산> 창간 초기의 스토리나 1970년대 초반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곧 문을 닫은 <산악인> <산수>와도 같은 잡지를 비롯해 서구에서도 산악전문지의 운명은 늘 이와같았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프>나 <암과 설>은 사라졌고, <악인>은 기사회생하여 명맥을 잇고 있다. 구미 역시 영국의 <마운틴>과 미국의 <어센트> 등은 이제 사람들에게 그저 그런 책이 있었나보다 하는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사라진 이 책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기존 상업지와 같은 다이제스트식 기사 나열을 지양했으며, 스스로 독자를 한정하고 보다 깊고 넓은 산과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사회를 지면에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알피니스트> 역시 그와 같은 궤적을 따라왔지만, 과거보다 더 진보된 모습으로 2000년대 당시의 세계 산악계에 신선한 파장을 몰고 왔었다.
다행히 파산한 <알피니스트>를 인수하겠다는 곳이 나타났다. 스키, 산악자전거 등 다른 아웃도어 분야의 잡지를 발간하고 있는 HOL출판사였다. 그 무렵 <알피니스트>에는2004년 인턴으로 입사해 일하고 있던 케이티 아이브스라는 젊은 신입 여성 편집자가 있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소르본느 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며 등산을 시작한 케이티는 2009년 인수와 함께 편집장으로 새로 합류하게 된 당대 미국 알피니스트이자 산악문학계의 거장 마이클 케네디와 함께 <알피니스트>의 방향과 내용을 더욱 혁신적으로 바꾸어냈다.
당시의 일화를 보면 케이티가 <알피니스트>를 자신의 밥벌이 이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최근 아웃사이드 매거진 기사에 따르면, 인수 당시 케이티는 새로운 대표인 HOL출판사의 아담 하워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지하 사무실에서 땅콩버터와 젤리 샌드위치를 먹으며 살더라도 <알피니스트>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17년째 여전히 일주일에 90시간을 일하는 케이티 아이브스는 2012년부터 편집장이 되었다. 100페이지 내외의 계간지를 펴내며 무슨 일을 이렇게 많이 해야 하나 싶지만 매호 권두언인 ‘샤프엔드’의 2000단어로 된 한 꼭지를 쓰기 위해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된 900페이지 분량의 책들을 읽는 것에서부터 <알피니스트>는 시작된다. 여전히 어느 잡지와 미디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팩트 체커(fact checker)’라는 포지션에서 일하는 사람이 <알피니스트>에는 매번 10여 명이 있다. 단어 하나의 선택, 작은 일러스트와 사진 한 컷도 세계의 무수한 집단지성에게 묻고 확인한 결과인 것이다.
<알피니스트>는 여전히 몇 가지 큰 원칙을 갖고 출간하고 있다. 광고주들을 위한 기사를 싣지 않으며, 최소한의 광고만을 유치하고 대부분의 운영 동력은 독자들의 구독료에 의존하는 것. 또 스포츠클라이밍, 볼더링, 가이드 기사를 싣지 않는 것. 온라인이 아닌 종이로 된 인쇄매체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더욱 큰 원칙은 산을 둘러싼 모든 인류와 자연과 역사에 대해 편견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철저한 사실 확인을 거쳐아름다운 문장과 예술적인 편집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알피니스트>에는 그래서 BIPOC(흑인, 원주민, 유색인종)와 LBGTQ+(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를 비롯한 모든 소수자 및 장애인들과 공유하는 산에 관한 기사들이 비중 있게 실린다. 이러한 노력들이 단순히 워싱된 브랜드 마케팅이 아니라는 것은 <알피니스트>가 ‘아웃도어 CEO 다양성 서약(Outdoor CEO DiversityPledge)’에 정식으로 서명한 회사이며 주류 언론계에서 소외된 커뮤니티의 목소리에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포용을 위한 아웃도어 미디어(Outdoor Media for Inclusionproject)’의 회원사라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의 문제가 “다인종이자 다민족 연방국가인 미국에서만 필요한 시각이며, 아직 한국의 산악계에서는 필요 없는 일이 아니냐”라는 생각을 나 역시 책을 한국에 론칭하는 과정에서 고민했었다. 더군다나 주류 한국 산악계의 유독 보수적인 시각이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등산을 학문으로 본다면, 우리의 여러 학문이 그래왔듯이 과거 학문 수입의 단계에서 초기 수많은 지식들의 번역과정을 거치고 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영역이 넓어지고, 비로소 근래 들어 세계와 소통하며 응용연구가 진행되어가고 있는 과정속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등산학은 소수의 제한된 통로만을 통해 전해져 실체의 그림자만을 바라보고 있는 플라톤의 동굴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가 들었으며,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려면 무엇보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는 말처럼 경계를 허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피니스트>에 처음 이메일을 보낸 건 2019년 여름이었다. 한국에서 책을 펴내고 싶다는 뜬금없는 편지에는 다행히 답장이 왔지만 불가능하다는 거절의 내용이었다. 한국에서 책을 몇 권이나 팔까 하는 타산 때문이 아니라, 케이티 편집장과 파울라 라이트 편집자 두 사람이 만들고 있는 현실에서 다른 나라에까지 콘텐츠를 수출할 여력도 시간도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행히 그해 가을 캐나다 밴프에서 열리는 산악영화제와 산악도서전 현장에 파울라 라이트가 세미나를 위해 참석한다는 내용이 있었고, 변기태 하루재클럽 대표(현 한국산악회 회장)의 도움을 받아 김동수 하루재클럽 프로젝트 매니저(한국외대산악회)와 함께 그곳에 가 만날 수 있었다. 1시간여의 긴 대화 끝에 검토해보겠다는 대답을 받았고, 몇 차례의 조율을 통해 2020년 가을 1년짜리 판권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세계를 휩쓸기 시작하던 때였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도 기회는 찾아왔다. 미국에 살던 오영훈(대한산악연맹 국제교류위원장, 서울농대산악회)이 귀국해 편집장을 맡아주기로 했고(2022년부터는 내가 편집장을 겸한다) 평소 이러한 내용들에 관심 있던 산 다니는 후배들이 번역자로 활동해주기로 한 것이다.
이용대, 유학재, 김동수, 최석문 등 선배들은 기꺼이 앰버서더가 되어 책을 홍보하고 정기구독을 받아다 주었으며, 아크테릭스와 블랙다이아몬드코리아의 정호진 대표, 스탠리 유해연 대표, 하루재클럽 변기태 대표, 그리고 산악인들이 시작하고 운영하는 코오롱스포츠, 카라반, 안나푸르나, 울주세계산악영화제 등도 선뜻 새로운 파트너십에 동참해주었다.
<알피니스트> 한국어판을 펴내며 세운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가능한 독자의 힘으로 꾸려간다, 모든 콘텐츠에 대한 댓가는 정당하게 지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피니스트>는 매호 3만원이라는 엄청난 정가가 매겨져 있다.
종이에 잉크가 발린 것이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가격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이 나오기까지 원고를 투고해 준 세계의 수많은 산악문학 작가들의 실천적 노력과 위험에 대한 리스크, 그리고 편집과 인쇄에 이르기까지 숱한 날들을 지새우는 편집진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거기에 실린 단어 하나의 무게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알피니스트는 알피니즘을 실현하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알피니스트>에 싣는 것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하며 또 다른 산을 찾을 수 있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산악문화는 지속가능하게 재생산될 수 있으며, 거기엔 독자들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1년 전 232명으로 시작했던 정기구독자가 이 글을 쓰는 2021년 11월 현재 464명으로 꼭 두 배가 늘었다. 그중엔 내용이 기분 나쁘다며, 책이 왜 이렇게 얇고 비싸냐며, 글은 왜 이렇게 어렵냐며 해지한 분들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추락을 두려워해서야 어찌 알피니스트라 말할 수 있을까.
한국어판에 왜 한국의 소식이 실리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아직 등산이라는 학문은 수입의 단계이며, 보다 한국 사회와 산악계에 풍요로운 담론이 생성될 때 자연스레 알피니스트 한국어판의 시선도 우리 안으로 옮겨오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어판이 출간되며 오히려 한국보다도 세계 산악계가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매번 해적판처럼 잡지에 실리는 해외뉴스의 단신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세계의 알피니스트들과 직접 접촉하고 대화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자산이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의 누구에게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고, 그래서 한국의 산과 산악인은 서구에게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한국에 이어 남미에서도 이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도 다시 계약을 연장했다. 다시 1년간 오를 산이 앞에 펼쳐졌다.
이 글은 대한산악연맹 연보 <산악연감> 2021에 기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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